어느새, 겨울이 자취를 감추었다. 자연의 약속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. 봄비가 그치자 창경궁에는 영춘화(迎春花)가 곱게 피었고, 안산(鞍山)의 연못가에도 노란 수선화가 방죽 주위를 환히 밝히고 있다.어릴 적,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내 책보를 마루에 던지는 소리가 들리면, 방에 홀로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는 곧잘 요강을 비워 달라고 하셨다. 요강을 가져다가 비우고, 우물물에 씻는 둥 마는 둥 하다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, “내 손자야, 내 손자야”라며 고마워하셨다. 지금 내가 그때의 할머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. 태어나서 대소변
계절은 벌써 겨울의 절정에 서 있다.안산 언덕에 빨갛게 맺혀있는 산수유 열매가 칼칼한 겨울 앞에 빛을 잃고 무거운 침묵을 삼키고 있다.겨울은 삼라만상이 침묵하는 계절이다. 벌레들이 말문을 닫고 땅속으로 숨어들고 눈꽃이 환히 핀 나무들도 겨울의 위세 앞에 꼼짝 않고 묵묵히 서 있다. 사람들도 깊은 사유(思惟)의 강을 건넌다.추수가 끝난 황량한 빈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,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아득히 들리는 것 같다. 노란 민들레가 남기고 간 작은 풀씨처럼, 가슴으로만 삭여내야 하는, 갓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내 마음을 파고
빨간 단풍에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가던 가을이 거센 풍랑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. 한사코 붙잡아 내 곁에 오래 두고픈, 짧아서 아쉬운 가을의 끝자락이다.장욱진 화백의 회고전을 관람한 집안의 가까운 여동생은 “장 화백의 그림이 주로 가족과 송아지, 나무와 까치, 해와 달 등 무척 친근한 소재여서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”며 한번 다녀오라고 한다. 가족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단순히 한 가정의 아버지 이전에 훌륭한 인간으로 발돋움하기를 바랐던 작가의 성품에 그는 매료된 것 같았다. 작년 이맘때 남편을 잃은 그는, 그때의 슬픔을 아직도
한바탕 폭염(暴炎)의 잔치가 끝나고 나더니, 어느새 가을이 절정에 이르렀다. 가을이 오면, 고단한 여름을 보냈던 길섶의 풀잎들도 생기가 나고, 나 같은 병약한 노인들도 활기를 찾는다. 이 뒤숭숭한 세상에, 온갖 천연색의 다채로운 풍광이 여기저기에 펼쳐지다니 얼마나 고맙고, 감사한 일인가.이렇게 맑고 푸른 가을하늘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.모처럼 밖에 나와 보니 눈 닿는 곳마다 가을 향기가 가득하다. 산과 들에는 코스모스와 국화, 구절초와 쑥부쟁이, 백일홍과 각시취 등, 가을을 찬양하는 꽃들이 한창이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. 한해